돈코츠라멘
豚骨ラーメン.
일본 라멘의 하나. 돼지뼈를 푹 고은 뽀얀 국물을 베이스로 한 라멘. 돈코츠(발음대로 하자면 톤코츠다)란 말이 원래 돈골, 즉 돼지뼈란 뜻이다.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큐슈 지방에서 발달한 라멘으로, 일본 안에서는 후쿠오카시의 다른 이름을 딴 하카타라멘(博多ラーメン)이라는 말이 더 널리 쓰인다. 일본어 위키피디아도 하카타라멘 항목으로 작성되어 있다. 물론 큐슈 일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다른 지역에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전국구 대접을 받고 있으며, 해외로 나가도 대도시에 일본 라멘 전문점이 있다면 높은 확률로 돈코츠라멘을 판다.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한 체인점 잇푸도는 아예 해외 진출도 적극적으로 해서 아시아는 물론 런던, 파리, 뉴욕, 시드니와 같은 대도시에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한때 한국에도 진출했지만 지금은 철수했다.
일단 돼지뼈 국물을 사용한 라멘은 1941년에 나카스 지역의 포장마차(야타이)인 산마로(三馬路)에서 처음 선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에는 우리가 아는 돈코츠와는 많이 달라서 돼지뼈 국물이긴 하지만 맑은 국물에 넓적한 면을 썼다. 지금과 같은 뽀얗고 탁한 국물의 라멘에 대하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일단 등장 시기는 1946년으로 비슷하다. 중국 펑톈(지금의 센양) 쪽에서 인기를 끌던 짓센소바(十銭そば)에서 힌트를 얻어 탁한 국물을 사용한 라멘을 내놓았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하카타 남쪽에 있는 쿠루메시에서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설, 쿠루메시에서 나가사키 짬뽕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쿠루메시에서는 자기들이 돈코츠라멘의 원조라고 열심히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그 도시 자체가 별 인기가 없어서... 아무튼 포장마차 쪽에서 발전한 라멘인 것은 확실해 보이며, 지금도 나카스 포장마차촌이나 나가하마 포장마차촌에서 돈코츠라멘을 파는 곳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특징
다른 지방의 라멘도 돼지뼈나 닭뼈 국물을 많이 사용하지만 이들은 맑은 국물인데 반해 돈코츠라멘은 돼지뼈를 아예 녹여버릴 듯 푹푹 고아서 뿌연 하얀 국물이 걸쭉한 느낌마저 준다. 제주도의 고기국수나 부산의 돼지국밥을 연상하게 할 정도지만 국물의 걸쭉한 농도는 이들을 능가한다. 상당수의 돈코츠라멘이 돼지 누린내가 장난이 아니라서 입에 안 맞는 사람들도 많지만, 후쿠오카 쪽 사람들은 이런 누린내야말로 진정한 돈코츠라멘의 묘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돼지국밥이나 순댓국은 잘 하는 집 대접을 받으려면 돼지 누린내 잡는 게 중요하지만 돈코츠라멘은 그닥... 이 동네는 농도가 더 중요한 듯. 종종 이런 돈코츠라멘을 '콜라겐 듬뿍 국물'이라고 하면서 은근히 피부미용에 좋을 것처럼 광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1]
그래도 사람마다 취향은 있는 법으로, 누린내 없이 깔끔한 맛의 국물을 뽑아내는 집들도 많이 있다. 자기 입맛에 맞는 라멘집을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 특히 돈코츠라멘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외국에서도 인기를 조금씩 얻어 나가면서 누린내 없이 깔끔한 맛을 추구하는 라멘집도 많아졌다. 좀 덜 진한 대신 누린내가 적은 맛을 추구하는 쪽을 이른바 뉴웨이브 돈코츠라멘으로 분류된다. 해산물 국물이나 닭뼈 국물을 믹스해서 약간 가볍고 깔끔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가게들도 있다. 반면 후쿠오카 토박이 일본인 친구가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라멘집이 있다'고 하면서 같이 가보면 정말로 순댓국집보다 더욱 강렬한 돼지 냄새가 진동하는 가게에서 짠맛 작살인 라멘을 먹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을 포함한 외국(일본에서 보기에)에서 자기네 나라 사람들 입맛에 맞게 개량한 돈코츠라멘을 먹었던 사람들은 후쿠오카 현지인이 즐기는 오리지널 하카타라멘에 냄새만 맡아도 경악을 한다. 도저히 이 누린내에 적응 못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먹다 보면 어느새 매료돼서 알아서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
가게에 따라서는 절인 생강(베니쇼가)를 채썰어서 듬뿍 담아 놓는 곳들도 있는데, 이걸 반찬으로 먹는 게 아니라 국물에 넣어서 먹는다. 누린내를 좀 잡아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 후쿠오카 사람은 정말 팍팍 넣어서 먹는다. 만약 채썬 베니쇼가가 듬뿍 담긴 통이 있다면 그 집은 정통 하카타 스타일일 확률이 높다.
면은 보통의 라멘보다는 얇고 약간 단단한 식감을 주며 웨이브가 거의 없는 것이 널리 쓰인다. 면만 보면 라멘이라기보다는 소면에 가까운 느낌. 일본에서는 極細ストレート麺, 즉 '극세(아주 얇은) 스트레이트 (웨이브 없는) 면'이라고 부른다. 면이 얇아진 이유는 후쿠오카 사람들에 따르면 어항 근처에서 출항 전에 어부들이 후딱 한 그릇 요기를 하기 위해 찾다 보니 빨리 익도록 면이 얇아졌다고 한다. 후쿠오카현에서는 아예 하카타라멘에 최적화된 밀 품종인 라무기(ラー麦, らーむぎ)을 개발해서 2009년부터 보급하기까지 했다. 면의 단단한 식감은 간수(칸스이)를 얼마나 넣느냐, 그리고 얼마나 오래 익히느냐로 조절하는데, 가게마다 선호하는 정도가 달라서 아예 제면기를 들여 놓고 직접 뽑는 라멘집도 있다. 하카타라멘의 정통은 식감이 단단한 면이지만 식감 자체도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입 안에서 밀가루 느낌이 많이 나므로 면의 단단함을 조절할 수 있도록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는 가게들도 있다. 주로 다양한 종류의 면을 미리 넉넉하게 뽑아서 팔 여유가 되는 대형 체인점들이 이런 옵션을 제공한다.
단단한 면을 '카타', 부드러운 면을 '야와라카메'라고 부르며, 이 사이에 여러 단계를 두는 곳들도 있다. 면을 삶는 시간은 카타가 20~45초, 보통이 45~70초, 야와라카메가 70~100초 정도로 면이 얇기 때문에 빨리 익는다. '카타'보다도 더 단단한 쪽으로도 여러 단계가 있으며 이쪽은 그냥 끓는 물에 잠깐 데치는 수준으로 생면에 가깝다. 한국인들이라면 '카타' 정도로도 식감에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후쿠오카 현지인들, 특히 남자들은 카타를 선호하는 똥폼 경향이 있으므로 한번 도전해 보자.
일반적으로 라멘에는 반숙 달걀을 올려주는 게 보통이지만 하카타라멘은 달걀이 기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가게에 따라서 돈을 내고 따로 주문하면 넣어주기도 한다. 고명으로는 챠슈와 파를 올려주는 게 보통이고 김을 한 장 넣어주는 곳도 많다. 정통 스타일은 참깨를 뿌려주는 곳도 많다.
생각해 보면 일본 라멘 중에는 가장 정크 푸드스러운 라멘이기도 하다. 채소는 거의 들어가지 않으며 돼지뼈 국물과 돼지고기, 탄수화물 덩어리 국수가 거의 전부다. 현지 사람들도 건강에 그닥 좋은 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류
기본은 소금간. 즉 시오라멘이나 간장으로 간을 한 쇼유라멘이다. 소금만으로는 돼지 누린내가 너무 부각되어서인지 간장으로 간하는 것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돼지 국물이 워낙 뽀얗게 나오기 때문에 간장으로 간을 해도 보통 쇼유라멘 같이 짙은 색깔은 아니다. 일본 된장인 미소를 풀어 만든 미소 돈코츠라멘도 있지만 이쪽은 하카타라멘으로는 마이너고 오히려 외지인들이 선호한다.
돈코츠국물에 매운양념을 넣어서 빨간 국물로 만든 라멘도 있다. 그 대표격이 후쿠오카시 텐진 인근에 있는 이치란. 독서실처럼 한 명씩 완전히 분리된 공간에서 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돼지뼈 국물의 누린내가 싫은 분들은 이쪽이 괜찮은 선택일 수도. 순댓국에 다대기 풀어 먹는 맛이랄까. 후쿠오카를 넘어 일본 전역으로 확장 중에 있다. 잇푸도(一風堂) 라멘 역시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며 해외에도 지점을 여럿 냈다. 이런 대형 체인점은 외지인이나 관광객들이 많이 찾기도 하고 전국은 물론 잇푸도처럼 해외에도 영업하는 곳도 있어서 대체로 누린내 적은 뉴웨이브 스타일이다. 누린내를 참기 힘들다면 대형 체인점을 찾는 게 안전하다.
돈코츠라멘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후쿠오카시 전역에 퍼져 있는 하카타라멘이지만 큐슈 전역에 걸쳐서 여러 가지로 변형된 돈코츠라멘들을 찾아볼 수 있다.
나가하마라멘
후쿠오카시 안에는 하카타라멘 말고도 나가하마(長浜)라멘이라는 것도 있다. 1955년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나가하마에는 후쿠오카 최대 어시장과 어항이 있어서 어부와 상인들을 대상으로 주로 장사를 해 오던 라멘이다. 나가하마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후쿠오카시 일대에 나가하마라멘집들이 여기저기 포진해 있다.
같은 돈코츠라멘이지만 이쪽은 국물이 더욱 진하다. 딱 색깔만 봐도 뉴웨이브 스타일보다는 어두운 느낌. 게다가 . 비린내와 짠내에 익숙한 어부들을 상대로 한 것인지는 몰라도 간도 더더욱 짜고 누린내도 더더더욱 심하다. 누린내에 익숙치 못한 비위 약한 분들은 먹기 힘들 정도니 이름만 보고 무모하게 도전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차슈 대신 돼지고기볶음을 올려주는 것도 하카타라멘과 차이점. 베니쇼가(생강절임)를 넣고 참깨를 뿌려서 먹는데, 보통은 면만 건져먹고 국물은 잘 안 먹는 편. 안 먹는다기보다는 못 먹는 것에 가깝다. 하긴 저 누린내 + 짜디짠 소금물을 어떻게 먹어. 손님 중에는 간장을 넣어서 간을 더 세게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괜히 따라 하지 말자. 대체로 한국인 입맛에는 그냥 나오는 것만으로도 짠데 여기에 간장을 넣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원조격으로 꼽히는 간소나가하마야(元祖長浜屋)[2]는 아예 숟가락도 안 준다. 나가하마어시장 정문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한 블럭 쯤 가면 나가하마라멘집들이 여럿 모여 있는데, 일찌감치 손님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곳은 간소나가하마야 뿐이다. 기다리는 거 싫으면 아침에 일찌감치 쳐들어가자.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비위가 약한 외국인이면 몇 젓가락 먹지도 못하니 유명하다는 말만 듣고 갔다가 뜨악한 경험을 하지 말기 바라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실 것.
큐슈 일대에는 돈코츠라멘을 베이스로 다양한 변형을 가한 지역 특색의 라멘들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구마모토 쪽으로 가면 돈코츠에 볶은 마늘을 넣어서 색깔이 좀 더 어둡다. 마늘 덕택에 돼지 누린내가 상당히 잡혀서 돈코츠라멘을 잘 못 먹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맞는다.
쿠루메라멘
사가현 쿠루메시에서 만나볼 수 있는 라멘. 쿠루메(久留米, くるめ)라는 이름이 미식을 뜻하는 구루메(グルメ)와 비슷하지만 막상 가보면 이렇다 할 특산물이나 유명한 요리도 없는 애매한 쿠루메시가 그나마 밀고 있는 게 이 라멘이다. 아예 자기들이 돈코츠라멘의 원조라고도 주장하고 있다. 1937년 니시테츠 쿠루메역 앞에 개업한 포장마차 <난킨센료(なんきんせんりょう, 南京千両)>를 원조로 치고 있다. 창업주는 요코하마와 도쿄의 중화소바를 연구해서 돈코츠스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다만 이때는 국물이 지금과는 달리 약간 투명한 스타일이었다고.
스프의 돼지뼈 맛이 하카타 주류보다 더욱 강하고 짜서 나가하마라멘이 연상될 정도. 다만 김과 챠슈, 파를 올려주는 고명은 하카타라멘과 비슷하다. 여기도 누린내 때문에 힘들면 베니쇼가를 넣어 먹는 게 상책이다. 면은 웨이브 없는 스트레이트라는 면에서는 다른 돈코츠라멘과 비슷하지만 면의 굵기는 보통 하카타라멘보다는 약간 더 굵은 편이다. 하카타라멘이 국수가 얇은 이유가 어부들이 출항 전에 후딱 먹고 나갈 수 있도록 조리 시간이 짧은 얇은 면을 썼던 것에서 기원한 것을 생각해 보면 바다를 끼고 있지 않은 쿠루메에서 라멘 면발이 좀 더 굵은 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쿠마모토라멘
이름 그대로 쿠마모토현에서 만나볼 수 있는 라멘. 흑마늘을 넣어서 잡맛을 누그러뜨린 것을 특징으로 내세우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가끔 쿠마모토라멘을 파는 가게들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우리나라에도 돈코츠라멘을 파는 집이 여럿 있다. 쇼유라멘이나 미소라멘보다는 한참 나중에 인기를 끌었는데 초창기 돈코츠라멘의 인기에 큰 공을 세운 곳은 서울시 상수동의 하카타분코(博多文庫). 여기가 대박을 치면서 돈코츠라멘 파는 곳이 늘었다. 일본 체인점으로 여러 나라에 체인점을 내고 있는 잇푸도(一風堂, IPPUDO)가 한국에도 들어와서 강남을 중심으로 지점 세 개를 냈지만 2016년 2월 말에 모두 철수했다. 아직까지 쇼유라멘이나 미소라멘보다는 파는 곳이 적은 편이다. 라멘 대신에 우동을 넣은 돈코츠우동도 있는데 한국에 진출한 사누키 우동전문점 마루가메제면도 계절 한정으로 돈코츠우동을 판다.
돼지빼 국물을 베이스로 하는 뽀얀 국물의 국수 요리라는 점에서 제주도 음식인 고기국수와 공통점이 상당하지만 면의 종류나 스프의 스타일에는 차이가 난다. 그래도 제주도에 온 일본인 관광객들이라면 돈코츠라멘과 같은 듯 다른 고기국수는 거의 필수 코스로 통한다. 부산의 돼지국밥도 일본인들은 돈코츠라멘이 생각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