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포주
発泡酒(はっぽうしゅ)。일본어 발음으로는 '합포―슈'에 가깝다.
맥주의 일종, 일본 전용 용어다. 말 그대로 풀이해 보면 기포가 나는 술이란 뜻이다. 맥주같긴 한데 진짜 맥주는 아닌 그런 술이다. 심지어는 맥주라고 보기도 그렇고 비어로 봐야 하는 술도 있는가 하면 일본이이라서 맥주 아닌 발포주 취급을 받는 술도 있고... 아무튼 일본의 복잡한 주세법과 일본 맥주회사의 잔머리가 결합되어 제대로 꽃핀 개념.
일본의 주세법 제3조에 따르면 술은 맥주, 리큐어, 잡주를 비롯해서 17개 종류로 나뉜다. 맥주에 대한 주세는 보리의 함량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독일의 맥주순수령도 나름대로 갖다 써서 맥주에 넣을 수 있는 재료가 제한되어 있다. 그밖에 재료를 넣으면 맥주가 아닌 발포주로 분류된다. 일본 주세법에 따른 맥주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제3조 12 맥주 : 다음에 제시하는 주류에 알코올 도수가 20도 미만인 것으로 한다.
- 맥아[1], 홉 및 물을 원료로 발효한 것.
- 맥아, 홉, 물, 그리고 보리 기타 다른 정부령에서 정한 물질을 원료로 해서 발효한 것. (그 원료 중 맥아의 무게가 홉 또는 물 이외의 원료 무게 합계의 50/100를 넘는 것으로 하며, 그 원료 중 정부령에서 정한 물질의 무게 합계가 맥아 무게의 5/100를 넘지 않는 것으로 한정한다)
- 1 또는 2에 제시한 주류에 홉 또는 정부령에서 정한 물질을 첨가해서 발효한 것. (그 원료 중 맥아의 무게가 홉 또는 물 이외 원료의 무게 합계의 50/100를 넘는 것으로 하며, 그 원료 중 정부령에서 정한 물질의 무게 합계가 맥아 무게의 5/100를 넘지 않는 것으로 한정한다)
이것도 2018년에 개정된 주세법이 2020년에 발효되면서 많이 완화되었다.[2] 그 이전에는 예를 들어 벨기에의 호가든처럼 코리앤더, 오렌지 껍질을 비롯한 향신료를 사용하는 것도 발포주로 분류되었다. 반면 이런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독일의 바이젠 같은 밀맥주는 맥주로 분류되었다. 크래프트 비어 중에서도 발포주로 분류되는 게 부지기수였다. 지금은 개정된 주세법에 따라 맥아 함량의 5%까지는 과일, 향신료 같은 재료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호가든도 맥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의 맥주회사들도 좀 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일본 주세법에 따른 발포주의 정의는,
제 3조 18 발포주 : 맥아 또는 보리가 원료의 일부인 주류(같은 법 제3조 제7호부터 17호까지에 나와 있는 주류 및 맥아 또는 보리를 원료의 일부로 한 알코올 함유물을 증류한 것을 원료의 일부로 한 것은 제외)로 발포성을 가진 것을 뜻한다(알코올이 20도 미만인 것에 한정한다).
이들 조항을 합쳐 보면 맥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된 재료가 아닌 재료를 넣었거나, 허용된 재료라고 해도 맥아의 50%를 넘어가면, 즉 원료 중 맥아 함량이 2/3 이하가 되면 발포주가 된다. 350ml 작은 캔맥주 기준으로 보면 맥주의 주세는 77엔이고 발포주는 46.99엔이므로 주세절감 효과가 30엔에 이른다. 여기에 원가도 발포주 쪽이 더 싸므로 더더욱 저렴한 '맥주 비스무리한 술'이 된다.
일본 경제가 한참 잘나갈 때에는 별 관심을 못 받았다. 거품경제가 절정일 때에는 회사원들도 룸살롱에서 로마네페리뇽을 처마실 때였으니 발포주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거품이 빠지고 장기 불황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맥주고 뭐고 이제는 조금이라도 싼 것을 찾게 되니, 맥주회사들이 생각하길 '그러면 보리 함량을 줄여서 세금이 싼 맥주를 만들면 되겠네?' 하고 생각한 것. 게다가 소비세까지 오르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발포주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기린맥주에서 내놓은 탄레이. 이게 대박을 치면서 아사히 슈퍼 드라이 때문에 맥주 시장에서 밀리던 기린맥주가 다시 아사히맥주를 밀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다른 맥주 회사들이 발포주 개발에 불이 붙은 건 당연한 얘기. 편의점에 가보면 맥주 냉장고에 진짜 맥주는 3분의 1, 발포주는 3분의 2일 정도로 훨씬 종류가 많다. 처음에는 맥주와 비교했을 때 정말 질 떨어지는 한국 맥주급의 술이었지만[3] 인기가 높아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품질이 많이 향상되었다. 심지어는 생맥주처럼 통에 담아 업소로 나가는 타루나마 발포주도 있으며, 저렴한 술집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래 봤자 역시 진짜 맥주보다는 맛이 없는 건 사실.
위 그래프를 보면 아사히맥주와 삿포로맥주는 맥주 생산량이 절반을 넘지만 기린맥주는 발포주와 제3맥주 비중이 더 높다. 심지어 산토리는 아예 발포주는 없고 거의 3분의 2가 제3맥주다. 산토리야 원래 위스키가 주력이었고 맥주 시장에서는 후발 주자였지만 전통의 강자 기린맥주가 맥주 생산 비율이 저렇게 쪼그라든 건 좀 안습. 대체로 보면 일본 맥주 시장이 양극화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맥주만큼 맛난 것도 아니고 제3맥주처럼 싼 것도 아닌 발포주 시장은 둘 사이에 끼여 쪼그라드는 형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발포주가 꼭 싸구려 대량생산 맥주인가 하면 절대 아니다. 소량 생산되는 일본 맥주, 이른바 지비루(地ビール) 중에는 발포주가 많다. 이를 지합포슈(지발포주, 地発泡酒)라고 한다. 지역에서 소량 생산되는 맥주를 만들면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으실 텐데 한 단계 낮은 발포주로 허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최저 생산량. 맥주를 일반판매 하려면 연간 생산량이 최소 6만 리터가 될 수 있는 시설을 갖춰야 한다. 반면 발포주는 6천 리터로 10분의 1이니까 부담이 적다. 게다가 2020년 개정 주세법 발효 전까지는 과일이나 향신료를 사용한 맥주를 만들려면 일본 주세법에서 정의한 맥주에는 어긋나므로 짤없이 발포주로 빠졌다. 그런데 발포주로 빠지면 세금이 적게 부과되기 때문에 일부러 이 점을 이용해서 세법상 맥주에 넣어서는 안 되는 재료를 사용해서 만드는 지비루들도 있다. 대체로 유럽에서 맥주에 사용하지만 일본에서는 인정 안 되는 과일이나 향신료[4], 또는 지역의 특산물을 넣는 식이었는데, 발포주 1이 맥주와 세금이 차이가 없어지면서 무용지물이 됐다.
아무튼 발포주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자 당연히 일본 정부는 여기다가 세금을 더 걷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해졌다. 결국 2006년 발포주와 관련된 세법을 개정했다. 이에 따르면 1리터 당 주세는 다음과 갘다.
- 맥아 함량 50% 이상 : 220엔 (발포주 1)
- 50% 미만 25% 이상 : 178.125엔 (발포주 2)
- 25% 미만 : 134.25엔
당시에는 맥주와 발포주를 가르는 맥아 함량 기준이 67%였는데, 세법 개정에 따르면 맥아 함량이 50% 이상인 발포주의 세금은 맥주와 같아졌다.[5] 또한 맥아 함량에 따른 세금이 더욱 세분화 되었다. 맥주회사들은 이에 맞춰 더더욱 맥아의 함량을 줄이거나 심지어는 발포주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짝퉁 맥주인 신쟝르(新ジャンル), 혹은 제3맥주를 만드는 것으로 맞섰다. 원조로는 맥아는 한 톨도 안 쓰고 완두통 단백질을 주재료로 한 삿포로 드래프트원이며, 이쪽으로 제대로 히트 친 게 산토리의 킨무기(金麦)[6]로, 이후 신장르 맥주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오면서 일본 맥주 시장의 주류를 차지하기까지 한다. 제3맥주는 발포주에 알코올을 넣어서 도수를 맞춰 맥아 함량을 더 떨어뜨리는가 하면 아예 맥아 한 톨 안 들어가고 옥수수나 콩을 사용하는 것까지도 있다.
일본 슈퍼마켓에서 싸구려로 팔리는 발포주를 보면 은근히 한국산들이 있다. 하긴 우리나라 맥주 품질이 일본 발포주 정도이긴 한데, 어지간한 일본 발포주가 오히려 한국 맥주보다 낫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건 뭐... 한국의 하이트에서 생산한 발포주는 일본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단, 주로 PB 상품으로 팔리고 있어서 라벨 표시를 잘 들여다 봐야 한국산인지 알 수 있다.
맛은 맥아의 함량이 부족한 만큼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대체물로 알코올을 채우고 향미도 보완하지만 역시 오리지널만큼은 안 되는 게 현실. 싸서 마시는 술이지 맛 때문에 마시는 술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입맛도 길들여지고, 맥주회사들 사이 경쟁으로 계속해서 발전된 제품이 나오다보니 이제는 맥주보다 발포주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7] 맥아가 주는 특유의 향미를 모두가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맥아향이 약한 발포주를 선호는 사람들도 있는 것. 한편으로는 맛이 가벼운 일본음식에는 유럽의 맥아향 진한 맥주보다 일본식 드라이 라거가 더 낫다는 견해도 있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맛이 가벼운 음식에는 오히려 발포주가 더 나을 수 있다. 기름지기는 해도 소스 같은 것으로 맛을 진하게 내지 않은 튀김류에는 하이볼이나 발포주도 괜찮은 조합이다.
그런데 복잡한 일본의 주세 체계가 단순화되고, 발포주나 제3맥주의 이점이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중이다. 일본 정부의 주세 개정에 따르면 아래 표에서 보는 것처럼 2020년부터 맥주의 세금은 낮아지고 발포주나 제3맥주의 주세는 3년 단위로 높여서 2026년에는 세금을 똑같게 하도록 되어 있다.
(350ml 기준)
주종 | 현행 | 2020년 10월 | 2023년 10월 | 2026년 10월 |
---|---|---|---|---|
맥주 | 77.00엔 | 70.00엔 | 63.35엔 | 54.25엔 |
발포주 | 46.99엔 | |||
제3맥주 | 28.00엔 | 37.80엔 | 46.99엔 |
그래도 발포주나 제3맥주 쪽이 원가는 싸므로 조금이라도 저렴하긴 하겠으나, 가격 메리트는 확실히 많이 줄어들 것이다.
한국에서
한국에도 발포주, 아니, 일본 기준으로 보면 제3맥주에 해당하는 술이 나왔고, 심지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바로 하이트진로에서 만드는 필라이트. 우리나라의 주세법에는 '발포주'라는 분류가 없기 때문에 필라이트는 공식적으로 발포주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지만 만드는 방법이나 저렴한 가격, 그리고 그런 저렴한 가격이 가능한 이유를 보면 딱 일본 발포주 포지션이다. 필라이트는 맥아 함량이 낮기 때문에 출고가도 낮은 데다가 세법상 맥주가 아니라 '기타주류'로 분류되므로 주세까지 낮다. 2019년 편의점 기준으로 500 ml 한 캔에 1,600원에 판다. 국산 맥주가 2,500~2,700원 정도인 걸 생각하면 엄청난 가격 경쟁력. 물론 제대로 만든 맥주보다야 맛은 떨어지지만 일본에서 발포주가 히트친 것도 결국 버블 경제가 무너진 후 주머니가 허전해진 사람들을 사로잡은 가격 경쟁력 문제였고, 한편으로는 한국 맥주가 대단히 맛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정서도 있고, 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OB맥주에서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지 '필굿'이라는, 이름부터 누가 봐도 필라이트의 미투 제품이란 게 뻔해 보이는 제품을 내놓았다. 자진해서 발포주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필라이트와는 달리 이쪽은 대놓고 캔에다가 발포주라고, 심지어 일본어인 Happoshu라고 써놓고 있다. 필라이트가 코끼리를 캐릭터로 내세우고 있다면 필굿은 술고래를 내세우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본의 기준으로 보면 이것도 발포주라기보다는 제3맥주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발포주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는 못하고 있다. 대량생산 맥주 가격이 그닥 비싼 것도 아니고, 역시 맥주보다는 맛이 없다. 그리고 일본처럼 회사들이 열을 올리면서 경쟁해서 다양한 제품을 쏟아내는 것도 아니다. 값 싸고 많이 마실 수 있는 걸 찾는 대학생들은 꽤 찾는 편이지만[8] 대체로 값싼 틈새시장 정도에 그치고 있다.
각주
- ↑ 밀맥아 포함.
- ↑ "일 '맥주 정의' 변경…과일·허브 맥주 대거 나온다", 연합뉴스, 2018년 4월 2일.
- ↑ 사실 일본의 드라이 맥주도 한국 맥주보다 딱히 맛이 있다고 하기는 뭐하다.
비싸니까 맛있다고 최면을 거는 거지하지만 둘 사이의 차이는 품질 관리가 잘 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 ↑ 대표적인 게 벨기에 밀맥주에서 많이 쓰이는 오렌지 껍질이나 코리앤더 같은 것들.
- ↑ 2018년 개정 주세법에서 맥주의 맥아 함량 하한선을 50%로 낮추었기 때문에 이들 발포주는 맥주에 허용된 부재료를 쓰지 않는 한은 이제 맥주로 분류된다.
- ↑ 킨무기에는 맥아가 들어간다. 일단 이름에 보리 맥(麥)을 써 놓고 맥아가 안 들어가면 소비자를 오인시킬 수 있어서 문제가 된다.
- ↑ 우리나라도 맥주나 소주보다 소맥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 ↑ 특히 MT 같은 경우에는 작정하고 밤새도록 많이 마시게 마련이라 인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