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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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apore Sling.

싱가포르 래플스호텔[1] <롱바>의 오리지널 싱가포르 슬링. 이 글래스도 기념품으로 판다.

칵테일의 일종으로 말 그대로 싱가포르가 그 기원이다.

유래

롱바 앞에 세워 놓은 니암 통 분의 초상.

더 정확히는 1915년 혹은 그 이전에 싱가포르의 래플스호텔에 있는 롱바(Long Bar)의 중국 하이난계 바텐더 니암 통 분(Ngiam Tong Boon)이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나, 이미 비슷한 레서피의 칵테일이 싱가포르에 돌고 있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1910년대에 만들어진 것만큼은 분명한 듯한데, 처음에는 진 슬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슬링'이란 증류주와 물에 단맛과 향미를 더한 미국 스타일의 칵테일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한참 인기가 좋다가 1930년대 들어서는 인기가 시들해졌다가, 1980년대 이후에야 다시 인기를 얻어 싱가포르의 대표 칵테일로 자리를 잡는다. 문제는 그 사이에 오리지널 레시피가 실종되었다는 것. 1980년대까지는 거의 그레나딘으로 만든 단순한 칵테일에 가까웠으며, 이후 과일 쥬스와 몇 가지 재료들이 추가되면서 다시 오리지널 레시피에 가까운 방향으로 변화했다.

싱가포르의 학자들에 따르면 싱가포르 슬링이 탄생한 배경에는 당시 싱가포르를 식민지로 점령하고 있던 영국의 남녀차별이 배경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영국 및 식민지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남자들만 을 마실 수 있었는데, 그래서 바에서도 남자들은 진토닉 같은 을 마시는 동안 여자들은 홍차쥬스밖에는 마실 수 없었다고 한다. 이걸 본 바텐더, 위의 유래로 본다면 아마도 니암 통 분이 을 베이스로 해서 여러 가지 쥬스를 혼합한 칵테일을 만들었다고 한다. 칵테일을 담은 잔도 영락 없는 쥬스잔이고 가나슈로 파인애플을 꽂은 모양까지 보면 영락 없이 펀치[2] 모양이다. 맛 역시도 여러 가지 쥬스리큐르 때문에 느낌이 적고 달달하다. 즉 은 마시고 싶지만 당시의 남녀차별 때문에 에서 을 마실 수 없었던 여성들에게 펀치인 척 마실 수 있도록 개발한 칵테일싱가포르 슬링이었다는 해석이다.

지금도 롱바가 운영되고 있어서 원조 싱가포르 슬링을 찾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예약 안 해도 되고[3] 그냥 깔끔한 옷이면 티셔츠에 반바지라고 해도 딱히 출입 제한도 없기 때문에 싱가포르에 갔다면 부담 없이 한 번 가 보자. 대신 원조 답게 좀 비싸긴 하다. 2016년 2월 기준으로 한 잔에 31 SGD(서비스료와 세금 제외). 우리 돈으로 2만 5천원쯤 한다. 다른 칵테일도 있지만 손님들은 거의 이걸 찾고, 이거 마시려고 가는 것이다.

Raffles sling shaker.jpg

주문이 적을 때에는 바텐더가 한 잔 한 잔씩 만들어 주지만 주문이 많이 밀릴 때에는 마치 자동차 실린더를 연상시키는 기계에다가 한 잔씩 넣고 핸들을 돌려서 한꺼번에 섞는 방법을 사용한다. 한 번에 여섯 잔까지 만들 수 있는데 자동 기계가 아닌 큼직한 수동 기계라서 이것 역시 볼거리다.

만드는 법

오리지널 싱가포르 슬링, 또는 싱가포르 슬링 래플스 스타일의 레서피는 다음과 같다.

싱가포르 래플스호텔 <롱바> 의 오리지널 싱가포르 슬링 레서피.

그런데 심지어 래플스호텔 롱바에서 판매하는 이 칵테일조차도 '오리지널' 니암 통 분의 레서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의 레서피는 롱바의 바텐더 사이에서 알음알음 내려오는 것과 여러 가지 기록들을 종합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레서피 중에서는 오리지널에 최대한 가깝다고는 말할 수 있어도 정확히 그 때 그 오리지널인지는 확실치 않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니암 통 분이 과연 진짜 원조인지도 확실치는 않다.

다량의 리큐르와 쥬스가 들어가기 때문에 같지 않고 단맛이 많이 나지만 체리 계열의 리큐르파인애플라임의 신맛이 무척 조화를 잘 이룬다. 너무 달달할라치면 산뜻한 신맛과 비터의 약한 쓴맛이 균형을 잡아주는 스타일. 싱가포르 답게 열대 기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칵테일이다.

사실 칵테일 치고는 들어가는 재료가 많기 때문에 대부분은 간략화된 버전으로 만든다. 이쪽 버전은 좀더 단맛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균형 잡힌 복잡한 맛의 깊이는 확실히 래플스 스타일이 한수 위. 일반 바에서 주문하려면 래플스 스타일이라고 얘기해 줘야 하지만 저 재료들이 다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사실 바텐더 중에는 저 레서피를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므로 어지간히 급이 있는 전문 칵테일 바 아니면 괜히 잘난척 한다고 래플스 스타일 어쩌고 하지 말자. 싱가포르에 가도 롱바 말고는 래플스 스타일로 만들어주는 데가 별로 없다. 도시국가인 작은 싱가포르에서 래플스호텔까지 가기 힘들어서 딴 데서 오리지널을 찾을 필요도 없기도 하다.

이런저런 이야기

싱가포르항공 기내에서 제공되는 싱가포르 슬링.

싱가포르항공 기내에서 싱가포르 슬링을 주문할 수 있다. 미리 믹스된 농축액에 파인애플 쥬스을 타서 만드는 식으로 아주 간략화되긴 했어도 마셔 보면 그냥저냥한 바에서 파는 것보다 낫다. 싱가포르항공 탔다면 꼭 한 번 주문해서 마셔보자. 싱가포르항공이 운영하는 공항 라운지에서도 대부분 싱가포르 슬링을 제공한다. 여기서는 가나슈도 꽂고 좀 더 제대로 만들기 때문에 싱가포르항공 라운지에 갈 일 있으면 주문해 보자. 기내 면세점이나 싱가포르공항 면세점에서도 싱가포르 슬링 믹스를 판다.

창이공항 면세구역에도 래플스호텔 롱바가 생겼다. 제3터미널 A 구역 근처에 있는 2층 구조의 대형 주류판매점 2층에 자리잡고 있다. 싱가포르 환승 예정인데 공항 바깥으로 나갈 여유가 없다면 여기서 공짜로 작은 잔으로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다만 바로 그 자리에서 재료 섞고 흔들어서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을 제공하고 가나슈고 뭐고도 없기 때문에 진짜 래플스호텔에서 내주는 것보다는 많이 간략하며 가나슈 장식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사람이 거의 없어서 좀 뻘쭘하긴 하지만 공짠데. 그래도 롱바 이름을 걸고 하는만큼, 오리지널 레시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래플스호텔 롱바에서는 자매품으로 슬링 1887이라는 것을 판다. 1887년에 나온 레서피는 아니고 그럼 싱가포르 슬링보다 더 오래 됐다는 얘기잖아 래플스호텔이 문을 연 해가 1887년이다. 125주년 기념으로 만든 칵테일이라고 하니 역사는 싱가포르 슬링보다 어마어마하게 짧다.[4] 파인애플 쥬스 대신 스파클링 와인을 넣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이고 세부 레서피에도 약간 차이가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들어가는 재료의 종류는 이쪽이 조금 더 많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싱가포르 슬링보다 1 SGD 더 받는다. 마셔보면 파인애플 쥬스의 단맛 대신 톡 쏘는 탄산가스와 좀더 드라이한 스파클링 와인의 맛이 드러난다. 싱가포르 슬링이 너무 달다고 생각한다면 이쪽을 마셔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싱가포르 슬링 한 잔만으로는 좀 부족하지만 한 잔 또 마시기에는 뭣할 때 선택할 만한 칵테일이다. 싱가포르항공비즈니스 클래스에서 실버크리스 슬링이라는 칵테일을 주문할 수 있는데 진 대신 샴페인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이것과 비슷한 레시피라고 할 수 있다.

Long bar peanuts bag.jpg

롱바는 싱가포르 슬링의 원조라는 것 말고 또 한 가지 유명한 게 있는데, 바로 땅콩이다. 테이블, 그리고 바 이곳저곳에 조그만 땅콩 포대가 하나씩 있는데, 겉껍질까지 있는 볶은 땅콩이 들어 있다. 이걸 먹을 때 껍질을 까서 그냥 땅바닥에 버리면 된다. 바에 가 보면 바닥이 땅콩껍질 천지다. 껌도 마음대로 못 씹도록 공공질서를 엄청 세게 강요하는 싱가포르 사회에서 나름대로 일탈을 해 볼 수 있는 곳.

각주

  1. 영국 식민지 시절 현대적인 싱가포르 도시를 구축한 인물인 토마스 래플스 경의 이름을 딴 것으로, 그밖에도 싱가포르에는 토마스 래플스의 동상이나 그의 이름을 딴 장소가 여럿 있다.
  2. 쥬스를 섞어서 만드는 음료.
  3. 다만 줄서서 기다려야 할 때가 종종 있다. 다행히 아주 몰리는 때 아니면 1~20분 정도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4. "A New Sling at Raffles", Lunch Magazine, 14 September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