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 모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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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자동차연맹(FIA) 회장.

모터스포츠 경력 이전

1940년 4월 13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사실 아버지인 오스월드 모즐리가 열렬한 나치였다. 영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영국인 랭킹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인데 히틀러가 한참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영국에다가 나치 조직인 영국파시스트연합을 만들어서 히틀러에게 열심히 부역하던 인물이다. 그런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부끄럽게 여긴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모터스포츠 쪽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에 대해서도 청년 시절에는 전후에 아버지가 만든 유니언 무브먼트라는 극우정당 활동에 관여했고 한때는 '아버지의 오른팔' 소리까지 들었지만, 나중에는 정치계로부터 발을 빼기 위해서 다른 관심거리를 찾다가 모터스포츠 쪽에 발을 들였다는 것. 그런데 아래에 나오는 나치 관련 스캔들 때문에 정말로 아버지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는지 의문이 제기되었고 그 바람에 다시 아버지가 많이 화제에 오르면서 부자가 세트로 욕도 더 먹었다. 그래도 정치에 대한 꿈은 못 버렸는지 1980년대에 보수당을 등에 업고 의회에 들어가려고 한 적도 있다. 1990년에는 반대파 정당인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를 지지해서[1] 기부도 했지만 노동당이 더 이상 맥스에게 기부를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만큼 영국 정계에 오스왈드 모즐리의 그림자는 크다.

모터스포츠

법률가이자 아마추어 레이싱 드라이버로 활동하다가 1969년 마치엔지니어링(March Engineering)을 공동 설립한다. 마치 팀은 1970년부터 1992년까지 20년 넘게 포뮬러 1에 버티고 있었지만 챔피언 배출은 못했고 레이스 우승도 딱 두 번. 니키 라우더도 이 팀에 있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맥스는 이를 기반으로 브라밤 팀을 이끌고 있던 버니 에클레스톤과 함께 포뮬러1컨스트럭터연합(FOCA) 설립을 주도했다. 결국 80년대 말 F1 팀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FIA-FISA 체제를 무너뜨리면서 FIA 회장으로 등극했다. 이들의 주도로 F1에 참여하는 주체들 사이에 콩코드 협정이 체결되고 F1 운영의 새 판이 짜이면서 버니 에클레스톤F1의 상업권을 싹 모아 잡수셨다.

FIA 회장

FIA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2008년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뉴스 오브 더 월드>에서 그가 매춘부 다섯 명과 노는 사진들을 공개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사진을 보면 여러 종류의 SM코스프레까지 나오는데 심지어 매춘부 중에는 나치 복장으로 의심되는 코스프레를 한 사람도 있었다. 전 세계 모터스포츠를 이끄는 수장이 매춘부 앞에서 엉덩이 까고 채찍 맞는 사진이 적나라하게 공개되어버렸으니 모터스포츠에 관심 없는 우리나라 빼고는 세계가 발칵 뒤집힐 일. 사퇴 압력이 거세게 일었고 특히 유대계 커뮤니티 쪽에서 강하게 반발했지만 이건 사생활에 불과하고 나치 코스프레는 오해라고 버티면서 끝끝내 자기 임기 채우고 물러났다. 한편으로는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뉴스 오브 더 월드>를 고소해서 승소함으로써 6만 파운드를 배상 받는다. 이후 <뉴스 오브 더 월드>는 폰 해킹 스캔들이 터지면서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나중에 드러난 더 골때리는 사실은, 매춘부 다섯 명 중 한 명은 영국 비밀정보부(MI6) 요원의 부인이었다고... 요즘 남편 제임스 본드가 월급이 밀려서 분유값 벌려고 어쩔 수 없이... 나중에 버니 에클레스톤은 지인들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의 표지를 맥스를 놀려먹는 그림으로 했다.

F1을 쥐고 있던 FISA의 횡포에 반발해서 팀들을 규합, 버니 에클레스톤과 함께 FIA-FISA 체제를 붕괴시켰지만 그 대신 FIA-FOCA 체제를 구축했고 그 자신도 팀들과 벼랑 끝까지 대결했던 적이 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팀들이 막대한 돈을 투자하면서도 F1에서 생기는 이익은 대부분 버니가 챙겨가는 구조였다. 1995년 FIAF1의 TV 중계권을 FOCA에서 빼앗아 버니 에클레스톤에게 100년 동안 권한을 주는데 그 때 버니가 지불한 돈은 3억6천만 달러 일시불이었다. 100년 동안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거머쥔 것에 비하면 정말로 헐값에 불과했다. 이것 말고도 F1으로부터 나오는 수익을 버니가 거의 독차지하는 구조도 많은 불만을 샀다. 경기장 안에서 콜라 하나를 사 먹어도 버니의 주머니로 일정 부분이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 이러한 대립이 격화되었는데, 당시 주요 팀들은 자동차 회사들의 워크스 팀이라고 할 만큼 자동차 회사들이 여럿 들어와 있었고, 이들은 그야말로 재주는 자기들이 넘고 돈은 버니가 챙겨가는 구조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그랑프리월드챔피언십(GPWC)을 따로 만들겠다고 위협했고, 맥스는 할 테면 해 봐라, 대신 다음 해 F1 참가 신청을 일찍 받을 거니까 이 기간 안에 신청 안하면 F1은 없다고 맞섰다. 결국 페라리가 다른 팀들의 뒤통수를 치고[2] F1에 참가 신청을 한 게 도화선이 되어 GPWC는 붕괴한다.

2009년에 다시 한번 문제가 터지는데 이번에는 맥스가 F1에 예산 상한(버짓 캡)을 도입하려고 했다가[3] 주요 팀들의 반발을 샀다. 다시 한번 팀들은 딴 살림을 차리겠다고 나섰는데, 이번에는 맥스가 패배했다. 2000년 초반과는 달리 페라리도 이탈하지 않았고[4], 이미 스캔들도 맥스의 명성에도 잔뜩 먹칠이 된지라 이번에는 상황이 불리했다. 결국 예산 상한은 없던 일이 되었고, 맥스는 당시의 임기를 마치고 나면 재선에 도전하지 않기로 했다. 2009년 10월, 맥스는 임기를 마치고 FIA 회장직을 물러난다.

FIA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차기 회장으로 페라리 팀 단장 출신의 쟝 토드핀란드의 랠리 드라이버 출신이자 유럽의회 의원인 아리 바타넨이 경합했는데, 맥스가 쟝 토드를 뽑아달라고 노골적으로 밀어서 선거 공정성과 관한 논란이 일었다. 맥스 모즐리-버니 에클레스톤이 다 해 먹던 F1에 질려버린 팬들은 바타넨이 회장이 되어 갈아 엎어줬으면 했지만 현실은 현실. 맥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쟝 토드는 바타넨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쟝 토드가 회장에 취임한 뒤로는 뭔가 유약해 보이는 태도에 맥스는 좀 못마땅한 눈치다.[5] 밀어붙일 때는 밀어붙여야 한다면서 간간이 쟝 토드를 까는 듯한 멘트가 보도되기도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적어도 그가 재임하던 시기에 모터스포츠의 안전에 획기적인 진전이 있었다는 그래서 관중들 보기에는 재미 없어졌다는 평가만큼은 맥스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인정한다. 특히 아일톤 세나가 1994년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후, 강력하게 안전 관련 규제 강화를 밀어붙임으로써 그 이후로는 아직 F1 경기 중 선수가 사망한 사례는 나오지 않았는데... 2014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쥘 비앙키가 사고로 장기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면서 세나 이후 최초의 희생자가 나오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분위기다. 또한 선수만 안 죽었다 뿐이지 F1 경기 중 관객이나 오피셜이 사고로 튕겨나온 타이어와 같은 잔해에 맞아서 사망한 사고는 몇 차례 나왔다. 결국 쥘 비앙키는 사고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세나 이후 최초의 경기 중 사고로 숨진 F1 드라이버가 되었다.[6]

말년

FIA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그냥 언론에 자주 노출 안 되고 조용히 지냈다. 가끔 돌직구성 발언으로 언론에 보도는 되지만 그 정도면 조용히 지내는 편. 다만 <뉴스 오브 더 월드> 사건 이후로 언론으로부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활동은 열심히 했다. 독립된 언론 감시 단체를 만드는가 하면 폰 해킹 스캔들이 터졌을 때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데에도 돈을 썼다. 2009년에 아들 알렉산더를 먼저 떠나 보냈는데, 사인은 '비의존성 약물 남용'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맥스는 <뉴스 오브 더 월드> 사건이 아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고 밝힌 바 있다.

암으로 투병해 오다가 2021년 5월 24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말기 미만성 큰 B-세포 림프종[7] 진단을 받고 나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겠다는 계획을 부인과 공유했고, 함께 마지막 식사를 했고, 유서까지 썼다고 한다.[8]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물이었지만 적어도 아일톤 세나의 사망 사고 이후 모터스포츠의 안전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많은 생명을 살린 것만큼은 분명한 업적이기 때문에[9] 전 세계 모터스포츠계의 애도가 쏟아지고 있다.

각주

  1. 노동당이긴 했지만 기존 노동당의 노선과는 다른, 온건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보수층 지지자도 꽤 많았다.
  2. 물밑에서 맥스-버니와 협상을 해서 돈을 더 받기로 했다.
  3. 팀의 운영 비용이 너무 커지다 보니 자동차 회사들이 이탈하는 문제, 팀이 망하는 문제, 그리고 그 자리를 채워 줄 신생 팀이 없는 문제들이 있었다. 그래서 엔진 개발을 5년 동안 동결한다든가 하는 비용 절감 방안이 이것저것 나오긴 했지만 맥스는 가장 확실한 방안은 버짓 캡이라고 생각했다.
  4. 2000년 초에는 페라리에 수익 배분을 더 해주는 식으로 배신을 때리게 만들었지만 예산 상한제는 페라리를 꼬드길 여지도 별로 없었다. 페라리만 예산 상한을 더 높게 책정했다가는 너무 심하게 티가 나는지라.
  5. 맥스가 팀들과 극한 대립 끝에 결국 파워게임에서 패배해서 밀려난 것이기도 하고, 자동차 회사들의 F1에 대한 관심도 예전 같지 않은지라 쟝 토드가 그와 같이 독하게 하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
  6. 이 사고는 여러 가지 논란들을 밀어 젖히고 포뮬러 카헤일로를 도입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7. 림프절에 생기는 암인 림프종의 일종으로, 림프종 가운데 가장 환자가 많이 나오는 종류다. 항암치료에 잘 반응하는 편이기 때문에 치료율이 높은 편이지만 일부는 항암치료에 실패하거나 재발하는데 이러한 불응성 또는 재발성 림프종은 예후가 불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맥스도 아마 이쪽 종류인 것으로 보인다.
  8. "Former F1 boss Max Mosley shot himself after terminal cancer diagnosis", BBC Sport, 30 March 2022.
  9. 그리고 이전의 FIA-FISA 체제를 끌고 가던 쟝-마리 발레스트르는 평가가 더 나쁜 양반이라... 또한 이 사람도 2차대전 때 프랑스에서 나치 친위대(SS)에 가담한 경력이 있다. 아버지가 아니라 본인이. 나중에는 사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비밀요원이었다고 주장했고, 그게 인정을 받았는지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