뵈브클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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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uve Clicquot.

프랑스 샴페인 브랜드.

코르크 마개 위에 있는 쇠뚜껑에 보면 웬 못생긴 아줌마의 초상화가 있는데, 이 분이 바로 뵈브클리코를 키워낸 주역인 바르브-니콜 퐁샤르당 여사다.

원래는 샹파뉴 지역에서 직물 유통업을 하던 필립 클리코가 1772년에 설립해서 1775년에 첫 로제 샴페인을 내놓은 것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 로제 샴페인은 처음부터 로제 와인을 만드는 게 아닌, 중간에 레드 와인을 타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필립 클리코는 직물 관련 사업을 주력으로 했고, 샴페인은 부업 정도로 생각했다. 한편 같은 지역의 니콜라 퐁샤르당이라는 사업가 역시 직물 사업을 했는데, 이 둘이 꽤 사이가 좋았는지 양가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 사업을 강화해 나갔다. 지금도 있는 집들끼리 혼맥으로 지위를 다지는 일이 종종 있지만 그때는 혼맥이 더더욱 심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니콜라 퐁샤르당의 딸 바르브-니콜 퐁샤르당과 필립 클리코 가문의 프랑수아 클리코가 결혼했는데, 당시 바르브-니콜 퐁샤르당은 21살이었다.

결혼 후 프랑수아는 사업을 잘 번창시켜 나갔고 그래서 아버지 필립은 아들에게 경영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특히 처음에는 부업 쯤으로나 여겼던 샴페인 쪽이 프랑수아가 경영을 맡으면서 장사가 엄청 잘 되어서 오히려 주력으로 올라설 정도였다. 그런데 결혼 6년 만에 남편이 갑자기 앓기 시작하더니 장티푸스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며칠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바람에 퐁샤르당 여사는 27살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그래서 브랜드에 '미망인'이라는 뜻의 뵈브(Veuve)가 붙은 것. 갑작스러운 죽음에 아버지 필립은 물론 장인 니콜라 퐁샤르당도 크게 충격을 받았고, 아예 사업체를 팔아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퐁샤르당 여사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서 사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했고, 두 사람을 설득해서 스스로 은행에 직물 무역, 거기에 샴페인 회사 운영까지 떠안게 되었다. 양가 부모까지 설득해서라도 남편의 뜻을 이어 받겠다는 용기도 대단했지만 당시 시대로는 여성이 이렇게 사업 전면에 나서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사업을 오히려 남편이 경영할 때보다 더더더더더더욱 번창시켰으니...

샴페인 병 안에 들어 있는 효모를 제거하는 방법인 러뮈아쥬데고쥬망을 개발한 것도 퐁샤르당 여사였다.[1] 그 전까지 스파클링 와인은 병 안에서 2차 발효가 끝나고 남은 효모 찌꺼기를 병에서 안전하게 빼낼 방법이 없어서 잘 가라앉힌 다음 살살 따라마셨는데, 처음에야 이렇게 하면 맑은 샴페인이 나올 수 있지만 병 안의 샴페인이 줄어들수록 더욱 많이 기울여서 따라아 햐기 때문에 샴페인 색깔이 흐릿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효모가 계속 병 안에 있기 때문에 효모 특유의 빵냄새가 너무 짙어지는 것도 문제. 효모를 깔끔하게 빼냄으로써 맑은 샴페인을 만들 수 있게 해서 품질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일등공신이 바로 뵈브클리코다. 더 중요한 건, 혼자 독점 안하고 누구나 쓰게 풀었다는 것. 샴페인 업계의 오픈소스의 어머니? 그와 같은 방법으로 안 만들면 샹파뉴에서 만들어도 샴페인이라는 말을 못 쓴다.

지금은 LVMH에 인수되어 있다. 즉, 모엣 에 샹돈헤네시와 한가족이라는 것. 이쪽에 인수된 유명 샴페인 회사들이 여럿 있는데 그 유명한 크뤽도 그 중 하나.

우리나라에서 이게 대중적으로 확 뜬 건 <섹스 앤 더 시티> 덕분. 클리코 퐁샤르당 여사가 그 시대에 여성 경영자로 성공한 셈이니 성공한 여성들의 상징은 뵈브클리코다! 하는 개드립이 난무하면서 한 때 인기 좀 끌었다.

각주

  1. 혼자는 아니고 셀러 마스터인 앙투완 뮐러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는데 아이디어 자체는 클리코 여사가 개발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