캇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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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nis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8월 17일 (화) 14:4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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かっぽう(割烹)。

캇포, 또는 캇포요리(割烹料理, 캇포료리)라고 한다. 특정한 요리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일본음식점의 스타일에 가까운 용어다. '캇', 즉 '카츠(たつ)'는 '자른다'는 뜻의 割(자를 할)이고, '포'는 찌거나 삶는 것을 뜻하는 烹(삶을 팽)이다. 말 그대로 풀어보면 '잘라서 찐다'는 뜻이지만 식칼로 재료를 자르고 열을 가해서 익히는, 요리의 기본 방법을 뜻하는 말이다.[1]

일본음식점의 스타일을 뜻할 때에는 주방과 손님의 공간이 같은 층이 있으며, 격리되어 있지 않고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주방의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고 카운터석에 앉은 손님과 요리사가 대화도 할 수 있으며, 음식도 카운터 위로 바로 넘겨 받을 수 있는 스타일의 구조를 뜻한다.[2] 음식점에 따라 카운터석만 있을 수도 있고 카운터석과 테이블석이 모두 있을 수도 있는데 일단 카운터석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다.

'캇포'라는 말이 지금과 같이 카운터석을 갖춘 음식점의 스타일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된 메이지시대, 혹은 뒤이은 타이쇼시대 정도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도쿄를 중심으로 한 에도요리에 대응하는 교토 중심의 카미가타요리(上方の料理)를 뜻하는 말로 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정보다는 간소화된 고급요리를 뜻하는 말로 변해갔다.[2] 이전 에도시대에 크게 흥했던 고급음식점인 요정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그 반작용으로 요정보다는 좀더 부담없는 가격대의 일본음식을 원하는 수요가 늘어났으며 이를 충족시키는 음식점들이 오사카를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캇포'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1] 메이지 후기 또는 타이쇼시대에 접어들면 지금과 같은 용법으로 정착되었다.

이전의 일본음식점은 손님이 언제 올 지 수요를 미리 예상해서 미리 요리를 준비하는 식이었다. 요정의 경우 주방은 손님이 볼 수 없도록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었으며 요리사와 손님이 마주칠 일 없이 시중을 드는 나카이상이 주문을 받고 음식을 가져다 줬다. 손님의 공간도 방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고급 요정은 게이샤가 시중도 들고 노래나 춤으로 흥을 돋우기도 했다. 캇포요리점은 손님이 오면 그 자리에서 주문을 받고 바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1] 그러다 보니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주방과 손님이 마주볼 수 있어서 바로 음식을 주문하고 넘겨받을 수 있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또한 카운터 너머로 직접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기다리며서 손님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요리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손님의 테이블이 모두 방으로 분리된 요정과는 달리 카운터석이 있어서 혼자서도 부담없이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의 많은 일본음식점은 캇포요리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음식점들이 손님이 볼 수 있는 트여 있는 주방, 손님과 요리사가 마주볼 수 있는 카운터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스시음식점은 회전초밥집을 제외하면[3] 거의 캇포 스타일이며, 센다이에서 시작된 로바타야키[4] 역시 그 구조는 영락없는 캇포요리점이다. 다만 캇포요리라고 하면 대체로 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용어의 기원 자체가 원래는 고급 요리의 대명사 중 하나인 교토요리를 뜻하는 것이었으며, 이후 뜻이 변하면서 과거의 요정을 좀 간소한 스타일로 바꾸되, 음식 자체는 요정만큼이나 고급스러운 것을 제공한다는 이미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격대가 높지 않은 대중식당도 '캇포'라는 이름을 달아놓은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이기 때문에 캇포요리라고 해서 꼭 고급스러운 것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각주

  1. 1.0 1.1 1.2 "割烹料理", OSAKA-INFO.
  2. 2.0 2.1 "割烹料理の意味や由来、料亭との違いをわかりやすく解説", 粋-iki-.
  3. 카운터석 위주긴 하지만 손님과 요리사가 직접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소통하는 식으로 운영되는 곳은 요즈음은 아주 드물다.
  4.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부터 '로바다야끼'라는 이름으로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돈많고 외국생활 경험으로 소비문화에 익숙한 상류층 젊은 집단을 뜻하는 '오렌지족'의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것 중에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