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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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ence Foster Jenkins.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전설의 소프라노. 블랙커피, 고음불가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실력파 개가수들의 원조. 문제는 얘들은 개그였지만 젠킨스 여사는 엄청 진지했다는 거.

성장, 그리고 고난의 젊은 시절

변호사이자 많은 부동산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나고 자란 플로렌스는 어렸을 때에는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다. 지역에서는 "포스터 아가씨"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했고, 백악관에서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꽤 날렸다. 어린 시절에 보여줬던 음악 재능 때문에 뒤에 나오겠지만 박자와 음정을 모조리 초월한 초현실적인 음악성이 뒤늦게 빛을 발한 이유에 관해서 여러 가지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유럽으로 음악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아버지가 즐~ 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프랭크 손톤 제임스 박사라는 사람과 눈이 맞아서 달아났지만 이 남자가 매독을 옮기는 바람에 고생하고 관계가 결딴났다. 하지만 당시는 이혼법이 없어서 따로 떨어져서만 살다가 이혼법이 생기고 나서 이혼해 버렸다.

이후 피아니스트로는 활동을 이어 나갔지만 그나마도 팔을 다친 여파로 어렵게 되자. 피아노 교사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그러다가 어머니와 함께 뉴욕으로 이주하고 영국 출신 배우 세인트 클레어 베이필드를 만났다. 베이필드는 이후 젠킨스 여사의 평생 동안 함께 살았고, 여사가 성악계에 혜성 같이 등장하면서부터는 매니저로 활약했다. 주로 하는 일은 악평이 실린 신문을 못 보게 막는 것. 하지만 둘은 동거만 했지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고, 여사는 평생 동안 첫 남편의 성인 젠킨스를 그대로 썼다.

인생 역전, 그리고 예술혼의 포텐이 터지다!

인생 역전이 시작된 것은 베이필드를 만난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다. 살아 있었을 때에는 딸의 음악 공부를 반대했지만 죽고 나서는 많은 유산을 안겨준 것. 이어서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그 유산까지 돌아오자 나자 굉장한 재력가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게 되는데...

결국 1912년에 개인 리사이틀을 열면서 성악계에 데뷔했다. 이미 40이 넘은 나이다. 포지션은 소프라노. 게다가 소프라노 중에서도 가장 높은 난이도로 초고음역을 소화하는 콜로랄투라까지 대담하게 소화해 냈다. 소화해 낸 건지 그냥 토해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표적인 예가 모차르트오페라 <마술피리>에 들어 있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 이 공연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비평가들은 온갖 조소와 비아냥, 반어법을 가득 담은 비평을 썼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오히려 여사의 음악 세계를 더 궁금해 하게 되면서 바야흐로 숨겨진 보석은 빚을 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사는 한편으로는 클래식 음악의 후원자로서 상당한 기여를 했다. 여사가 만든 푸치니 클럽이 그 대표적인 예로, 당대 최고의 가수 중 하나였던 엔리코 카루소도 이 클럽의 회원이었다. 성악가 욕심만 안 가졌어도 여사께서는 아마도 미국 클래식 음악계의 후원자 정도로 기록되고 대중들의 뇌리 속에서는 잊혔을 것이고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같은 것도 나올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일단 여사님의 위대하고 충공깽스러운 걸작인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듣기 전에, 예습 차원에서 조수미가 부른 버전을 들어 보자. 그래야 여사님의 버전을 들었을 때 밀려오는 감동과 충격이 배가 된다.

다른 유명 소프라노가 부른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찾아서 예습해 보면 더욱 좋다. 그리고 이제,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여사의 위대한 목소리 속으로 빠져 봅시다! 워낙 오래된 녹음이라 여사님의 뛰어난 목소리를 100% 완전한 음질로 즐길 수 없다는 것은 아쉽지만 감상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이런 낡은 레코드스러운 녹음이 어딘가 모르게 잘 어울리기도 한다.

여사는 나름대로 시대의 첨단을 달렸다고 볼 수 있는데, 일단 무대 연출에 굉장히 신경을 썼다. 화려한 드레스에 날개까지 뒤에 달고 나타나는가 하면, 무대에 대형 조개껍질 모형을 세워 놓고, 껍질이 열리면 그 안에서 짜잔~ 하고 나타나는 연출을 하는 것이 그 예. 워낙에 화려한 의상과 무대 장치를 동원하다 보니. 이런 무대 연출이 좋아서 공연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티켓 마케팅에도 독특한 재능을 보여서, 젠킨스는 자신의 공연을 보고자 하는 이를 자신의 응접실로 오도록 해서 직접 표를 팔았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잘 모르는 사람들, 특히 비평가들은 불행하게도 걸러졌다. 젠킨스 여사가 생전에 제대로 빛을 못 본 데에는 이렇게 비평가들이 그 분의 경이로운 예술을 감상할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탓도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탁월한 재능과 무대 연출로 날로 명성이 상승한 끝에, 결국 1944년 10월 25일에는 음악가라면 누구나 서 보고 싶어 한다는 그곳, 카네기홀 무대까지 서고 말았다! 이 분을 잘 모르던 사람들까지도 도대체 누구기에? 하는 생각에 관심이 왕창 올라갔고 결국 표가 홀라당 매진되었다! 게다가 관객들 중에는 명사들도 꽤 있었으며 뮤지컬 작곡가로 잘 알려진 콜 포터도 객석에 있었다고.

카네기홀 공연, 그리고 최후

여사님의 절정이었던 카네기홀 공연 후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탓인지 닷새만에 뉴욕의 음악 관련 상점에서 쇼핑 중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한 달 후 저 세상으로 가셨다. 결국 여사님은 쓰러지는 그날까지 음악과 함께였다. 하긴 그 때 나이가 76살이었으니 젊은 사람들도 엄청난 체력 부담을 안는 단독 콘서트를 치르고 나서 에너지가 바닥까지 빠졌을 터.

MBC <서프라이즈>에서는 지금까지 노래를 잘 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던 자신이 카네기홀 공연 이후에 쏟아지는 비난에 충격을 받아 쓰러져 숨진 것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이전까지는 청중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던 것과는 달리 카네기홀 공연은 일반적인 채널로 티켓이 팔렸고, 이전에는 공연장에 들어갈 기회가 없었던 비평가들도 공연을 볼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다음날 신문들은 온갖 풍자와 조소를 가득 담아 리뷰를 써 대긴 했다. 그러나 그동안도 그와 같은 악평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베이필드가 여사님이 보고 충격 받을 만한 신문은 싹 걷어내 줬을 것이다. 또한 일흔 여섯이나 되는 나이에 자기 공연 리뷰가 어땠을지 열심히 캐고 다녔을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정말 신문 보고 충격 받아 쓰러질 것 같으면 공연 다음날 바로 불귀의 객이 되었을 텐데, 공연 후 닷새가 더 지나서야, 그것도 쇼핑 하다가 쓰러졌다고 하니 설득력이 떨어진다.[1] 아마도 방송에서는 최후를 좀 더 극적으로 그리기 위해서 각색한 듯. 아무튼 젠킨스 여사는 무려 일흔 여섯의 나이에 평생 소원이자 음악 인생의 절정이었던 카네기홀 공연을 마친 후 어쨌거나 행복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

이 분의 실력에 관해서야 이견은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했던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그 이후로 전에는 올라가지 않던 고음역 F 음이 잘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택시기사한테 고급 시가를 선물했다나. 보통 때 같았으면 택시회사에 보상금을 청구할 일이었지만 조금이나마 자기의 음역이 나아졌다는 그 사실이라기보다는 뇌피셜 때문에 오히려 사고를 친 기사에게 선물을 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한 대인배였다.

2016년 이 분의 삶을 영화화 한 <플로렌스>가 공개되었다. 원제는 <Florence Foster Jenking>로 실제 이름과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8월 24일에 개봉. 메릴 스트립이 플로렌스 역을 맡았고 휴 그랜트가 두 번째 남편 겸 매니저인 클레어 베이필드 역을[2], 사이먼 헬버그가 전담 피아니스트인 코스미 맥문 역을 맡았다. 사운드트랙 앨범도 나오긴 했는데 연기력으로는 그 누구도 딴지를 걸 수 없는 메릴 스트립이 플로렌스 흉내를 내려고 혼신의 노력은 했으나 아무래도 여사의 위대한 재능에는 미치지 못해서 감동이 많이 떨어지는 게 흠이다. 메릴 스트립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는 올랐지만 수상은 하지 못했다. 노래를 더 못했어야 했어. 대신 방송영화비평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코미디여우상을 수상했다. 사실 메릴 스트립은 어린 시절에 성악 교육을 받았고, 노래 실력도 뛰어난 배우로 꼽힌다. <맘마미아>와 같은 뮤지컬 영화를 봐도 메릴 스트립의 진짜 실력이 여실히 드러난다.

후대에 가서는 젠킨스 여사의 탁월한 목소리는 첫 남편에게서 감염되었던 매독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고 백악관에서 연주할 정도라면 연주 실력은 물론 음감도 뛰어났을 것이다. 게다가 부모님의 유산을 물려받기 전까지 먹고살기 위해 피아니스트 혹은 피아노 교사로 오랫동안 활동했는데, 학부모들이 머리에 총맞지 않는 한은 박자 엉망, 음정 엉망인 선생님한테 자기 자녀를 맡겼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런 여사님이 가수로 활동하면서 음정도 리듬감도 모두 해체해 놓고서 그걸 몰랐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당시에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었던 매독균이 중추신경에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로 음감이 망가진 게 아니었겠는가 하는 견해다. 게다가 당시에는 매독 치료약으로 나돌고 있었던 게 수은이나 비소 같은 독성 물질이었기 때문에 젠킨스 여사가 이런 물질을 썼다면 더더욱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은이나 비소를 먹고도 76살까지 살았다면 정말로 인간 해독제 수준. 안 그랬다면 그저 그런 피아니스트나 성악가, 혹은 클래식 음악가 후원자 정도로 살다 갔을 텐데 이렇게도 지울 수 없는 큰 발자국을 남기고 가게 해 준 첫 남편에게 고마워 해야 하는 건지 어쩐 건지 모를 일.

앨범

활발한 공연 활동에 비하자면 이 분은 과작으로 남겨 놓은 녹음이 얼마 없다. 지금 구할 수 있는 앨범은 딱 하나, <The Glory (???) of the Human Voice>가 있다. 1992년 BMG에서 출시했고, 이후 디지털 리마스터판도 나왔다. 제목을 풀어 보자면 '위대한 (???) 인간의 목소리 (The Glory (???) of the Human Voice)'. 반드시 물음표 세 개가 들어가야 한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라이선스로 발매되었다. 원래 앨범으로 나왔던 것은 아니고 여사가 1941년과 1944년에 78회전 SP 싱글로 남긴 녹음들을 모은 것이다. 다행히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에게는 첫 트랙인 '밤의 여왕의 아리아'에서 그야말로 충공깽을 선사했다. 물론 그밖의 다른 트랙들도 대단히 주옥같은 명곡이다. 비록 아주 오래 전에 녹음된 거라 음질은 많이 안 좋지만 여사의 놀라운 음악성을 즐기기에는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여사의 절륜한 보컬에는 더 맞지 않나 싶을 정도다.

이 앨범의 표지를 잘 살펴 보면, 제니 윌리엄스(Jenny Williams)와 토마스 번즈(Thomas Burns)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사실 이 앨범은 두 개의 녹음을 붙여 놓은 것으로, 당시 음반사 BMG는 포스터 여사의 위대한 목소리를 복각해서 내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앨범으로 내기에는 양이 적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제니 윌리엄스와 토마스 번즈라는 부부가 찾아와서 음반을 내고 싶다고 배짱 좋게 지른 것. 평소 때라면 문 밖에서 경비가 쫓아냈겠지만 BMG에서는 이들의 노래를 들어 보고 포스터 여사의 걸작에 붙여서 앨범을 내자고 생각했고, 결국 둘을 묶어서 앨범이 나오게 되었다. 비록 젠킨스 여사에게 묻어가는 식이지만 동네 음악회에도 못 써먹을 수준의 노래 실력을 가지고 BMG라는 메이저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게 됐으니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목소리는 포스터 여사보다는 훨씬 덜 위대해서 결과적으로는 분량 채우기에 불과하다. 다만 마지막 트랙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화음 만큼은 들어볼 가치가 있다.

각주

  1. 신문의 혹평으로 충격을 받을 정도였으면 두문불출하다가 가셨을 텐데 당당하게 바깥 활동을 하다가 가셨으니...
  2. 베이필드가 영국 출신이었으니 적절한 캐스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