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키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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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간사이 지역의 에키벤 <후유노시(冬の詩)>

えきべん(駅弁)。

역(駅)+도시락(弁)이라는 뜻이다. 즉 기차역에서 파는 도시락이라는 뜻인데, 열차 안에서 파는 도시락까지도 묶어서 철도여행 때 먹는 도시락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우리나라나 중국을 비롯해서 도시락 문화가 있는 곳이라면 철도 도시락이 있지만 일본 쪽이 워낙에 살벌하게 발전하는 통에 에키벤이라는 이름이 명성을 날리고 있다. 일본에서 기차 여행을 할 때에는 필수 요소처럼 자리 잡고 있다.

에키벤은 다른 도시락에 비해서 제약 조건이 많다. 이를테면,

  • 온도와 보존성 : 에키벤은 완전히 포장된 상태로 진열해 놓는다. 바쁜 사람들이 곧바로 사서 열차에 올라탄다. 데우고 자시고 할 거 없이 차가운 상태에서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이 주종이다. 옛날에는 기차 여행이 훨씬 오래 걸렸으므로 두 개 사서 열차에 타기도 했으니까 보존성 문제도 중요했다.
  • 냄새 : 냄새가 강한 도시락은 차내에 냄새가 진동해서 다른 손님에게 폐를 끼치므로 될 수 있으면 냄새가 적은 도시락을 만들어야 한다.
  • 간편성 : 차내 공간은 비좁다. 테이블이 없거나 있어도 작기 때문에 좁은 테이블에 올려놓거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먹거나, 도시락을 손에 들고 먹기에 간편한 쪽이 좋다.

냉정하게 보자면 에키벤이 보통 도시락보다 맛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이 있기도 하고, 수요가 열차 승객으로 제한되고 판매처도 역과 열차 안으로 한정되어 있으므로 가성비가 그닥 좋은 편은 아니다. 가성비로 가려면 편의점에서 먹을 걸 사는 게 낫다. 웬만한 역이라면 편의점이 구내 또는 인근에 있고 가격도 에키벤보다는 싼 편인 데다가 전자레인지로 데워도 준다.

이런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에키벤은 지역 간 경쟁을 통해 굉장히 발달해 왔다. 각 지역마다 특산물과 향토 요리를 응용해서 나름대로 맛있고 독특한 에키벤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거듭해 왔고, 그런 노력이 쌓이면서 기차여행을 할 때에는 그 지역의 에키벤을 먹어 보는 게 하나의 필수요소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선택의 폭도 넓어서 대도시 주요역에 가 보면 수십 가지의 에키벤이 진열되어 있다. 뭘 고를지가 정말 고민스러울 정도.

맛이라든가 가성비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음식점의 음식이나 갓 만든 따뜻한 도시락과 비교했을 때 떨어진다는 것이지, 못 먹을 음식이라든가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가성비도 열차 여행의 환경을 감안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수준. 물론 여행이라는 특수성도 있다. 평소 같으면 맛 없어서 먹지도 않을 기내식을 비행기 안에서는 열심히 먹지 않는가. 사실 에키벤이 웬만한 기내식보다는 낫다. 일본에서 여러 도시를 열차를 이용해서 여행할 계획이라면 중간 중간 에키벤을 먹어 보자. 나름대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본의 에키벤은 대체로 초밥 계열이 많다. 보존성이 괜찮고 차가운 상태에서도 맛이 덜 딱딱하고 맛이 좋은 편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니기리즈시 스타일이 아닌, 틀에 밥과 네타를 놓고 눌러서 모양을 고정하는 오시즈시(押し寿司), 혹은 그릇에 담은 초밥에 여러 가지 재료를 얹는 치라시즈시 스타일이 주종을 이룬다. 그밖에는 또는 우리에게 익숙한, 밥과 여러 가지 반찬으로 이루어진 정식 도시락 스타일이나 도시락으로 만들기 좋은 덮밥도 주류를 이룬다. 어떤 경우에도 데우지 않은 콜드 밀이다. 콜드 밀인 관계로 보통 국물은 딸려오지 않는다.

아주 가격이 정신나간 에키벤도 있는데, 심지어는 하나에 우리 돈으로 100만 원이 넘어가는 놈들도 있다. 이런 도시락은 안에 들어가는 재료들도 초고급 퍼레이드지만 진짜 비싼 이유는 도시락 그릇으로, 특별 주문한 유명 장인의 칠기 그릇을 사용해서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게 뭔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이런 것들은 그냥은 안 팔고 미리 특별 주문을 해야만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