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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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폰테이넌에서 만드는 괴즈.

Lambic.

벨기에의 맥주 종류 가운데 하나. 브뤼셀 남서쪽 파이요테란드(Pajottenland)가 주 산지이며, 지리적 표시제에 따른 보호를 받고 있어서 이 지방에서 엄격한 규정을 지켜서 만든 맥주에만 '람빅'이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다. 기존의 맥주 스타일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이질적인 스타일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으며, 양조하는 방법도 다른 맥주와 비교하면 무척 이질적이다. 상면발효로 술이 만들어지므로 에일 계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에일과도, 라거와도 굉장히 다른 차별점이 있다.

그 차별점이 만들어지는 지점은 바로 '잡균'이다.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맥주는 당화가 이루어진 워트에 효모을 넣어서 양조를 진행한다. 잡균이 끼어들면 양조를 망치기 때문에 소독과 살균을 철저하게 하고 양조 용기를 밀폐한다.[1] 그런데 람빅은 쉽게 말해서 '잡균 환영'이다. 일부러 공기가 잘 통하도록 해서 효모는 물론 다른 미생물들이 내려와서 번식하도록 내버려둔다. 만약 보통의 맥주를 이랬다가는 에서 시큼한 맛이 나면서 맛탱이가 가버린 결과물이 나오는데, 이 신맛이야말로 바로 람빅의 특징이다. 게다가 양조를 안정되게 하고 술맛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효모를 배양해서 주입하는 요즈음의 맥주 양조기술과는 달리 람빅은 철저하게 자연에 의존한다. 효모도 바람을 타고 온 야생효모이고, 미생물도 공기 중에 떠다니던 것들이 내려앉는다. 그래서 단순히 신맛이라고만 정의할 수 없는, 맥주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희한한' 맛이 나온다. 신문지, 마분지, 텁텁한 느낌의 향미들이 나오는데, 다른 맥주 같으면 전혀 좋을 게 없는 향미들이 어우러져서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게 람빅이다. 이러한 희한한 맛을 내는 주요한 요인은 이른바 '브렛'이라고 하는, 브레타노미세스라고 하는 종류의 효모다.

야생 효모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가장 전통적인 방식의 맥주라고도 할 수 있고, 의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도 복불복이다. 물론 아무렇게나 만드는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좋은 람빅이 나올 수 있도록 주위 환경 유지에 신경이야 쓰지만 이 빚어지는 과정은 자연에 의존하는 게 람빅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

신맛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그냥 먹기는 여간 쉽지 않다. 대부분 시중에서 유통되는 람빅은 양조와 숙성을 오래 진행한 것과 짧게 진행한 것을 섞은 괴즈(Gueuze)라든가, 과일을 넣은 프뢰위트(Fruit), 모렐로 체리를 넣은 크릭(kriek) 처럼 좀 더 마시기 쉽게 만든 것이다.[2] 그런데 괴즈 정도만 되어도 그 특유의 신맛에 적응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만드는 방법

주 원료는 맥아와 밀이다. 맥아가 보통 80% 정도 들어가고 발아시키지 않은 밀 또는 밀가루가 20% 정도 쓰인다. 일단 이 녀석을 당화 시켜서 원액을 만드는 것까지는 보통 맥주와 비슷한데, 그 이후가 크게 다르다. 외부 미생물 침입을 철저하게 막는 다른 맥주와는 달리 람빅은 '외부 손님 환영'이므로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놓아야 한다. 원액을 만든 다음 넓고 얕은 쿨십(coolship)이라는 철판 그릇에 하룻밤 펼쳐 놓아서 외부 미생물이 들어올 수 있게 한다. 대략 120여 가지 미생물들이 관여하며 그 중 람빅의 캐릭터를 만드는 미생물만 8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발효는 상온에서 이루어지며 상면발효알코올이 만들어진다. 즉 양조 과정으로 보면 에일에 속한다. 하지만 에일발효 기간이 대체로 1주일 정도이고 저온 발효하는 라거도 2~4주 정도지만 람빅은 발효 과정이 그보다도 더뎌서 한 달이 넘어가기도 한다. 여기에 기온이 너무 더우면 잡다한 미생물이 과다하게 증식해서 을 망치기 쉽기 때문에 기후 조건도 맞아줘야 한다. 대체로 10월부터 5월까지의 서늘한 시기에 양조할 수 있는데, 그나마 기후 변화 때문에 람빅 양조를 할 수 있는 일수도 줄어드는 추세다.

람빅에도 을 사용하지만 만들어진 람빅을 마셔보면 다른 맥주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쓴맛이나 향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과다한 홉향이 오히려 람빅 고유의 향미를 해치기 때문에 일부러 묵은 을 건조시켜서 의 향은 최대한 억제하고 방부제 효과만 살리기 때문이다.

양조 후 숙성 역시 보통의 맥주와는 다른 비범함을 보인다. 일반 맥주는 숙성 기간이 수주에서 많아야 한 달 남짓이고 몇몇 예외를 빼면 금속 탱크에서 숙성하지만 람빅은 1년 이상, 몇 년 동안을 포트 와인 또는 셰리를 숙성했던 오크통에서 숙성하는 게 보통이고 그 숙성 과정도 통에 곰팡이가 필 정도로 미생물이 계속해서 관여한다.그때 상황에 따라 향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양조 과정을 컨트롤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람빅은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여러 빈티지와 나무통의 람빅을 블렌딩한다.

이러한 과정을 해석해 보면 한국이나 일본의 술과 비슷한 점이 꽤 있다. 효모만이 아니라 미생물, 그것도 자연 상태의 미생물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균이 양조에 개입한다는 면에서는 누룩을 사용할 우리 술과 비슷한 양조법이라 할 수 있고, 람빅 특유의 신맛 역시 한국의 막걸리라든가, 일본의 니혼슈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맛이다. 다만 람빅의 숙성 기간이 월등히 길고, 이 과정에서 신맛이 더더더더욱 강해지기 때문에 신맛의 정도는 큰 차이가 있다. 또한 대부분 과정을 자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결과물이 일정하지 않으므로 블렌딩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그래도 블렌딩한 시기에 따라 맛이 들쭉날쭉할 가능성이 있지만 이게 또 람빅 나름의 매력이다. 물론 노하우가 많이 쌓여감에 따라, 그리고 발효 및 숙성 관리 기술도 발전함에 따라 편차는 줄어드는 추세지만 그래도 근본적으로는 결과물을 컨트롤하기 어렵고 실패할 위험도 적지 않다.

블렌딩

보통 블렌딩이라고 하면 맥주에서는 낯선 용어다. 주로 위스키에서 많이 사용되고, 스파클링 와인도 빈티지가 쓰여 있지 않은 것은 종종 여러 빈티지의 원액을 블렌딩해서 만들곤 한다. 그런데 람빅은 블렌딩이 중요하다. 물론 블렌딩 없이 그냥 마시는 람빅도 있지만 엄청나게 신맛 때문에 웬만한 맥주 덕후들도 쉽게 마시기 어려운지라, 보통 숙성 기간이 다른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람빅을 섞어서 적절한 맛을 낸다. 심지어는 자체 양조를 하지 않고 다른 양조장에서 사들인 람빅들을 블렌딩만 해서 파는 회사도 있다. 대표적인 회사가 3폰테이넌(3 Fonteinen)으로, 주요 람빅 양조사로부터 원액을 사들여 블렌딩해서 판매하는데 평가가 무척 좋다. 이 회사가 온도 조절기 고장 사고로 만들고 있던 거의 모든 람빅을 망치고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회사에 원액을 공급하고 있던 유명 람빅 양조사들까지 나서서 회사 재건에 재원을 보탤 정도였다.

각주

  1. 보통 에어록을 설치해서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산화탄소는 밖으로 날아가게 하면서 바깥 공기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2. 람빅에서 쓰이는 용어들은 대부분 네덜란드어다. 람빅의 주산지가 네덜란드어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