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 주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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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nis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2월 26일 (토) 10:11 판 (→‎비판과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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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ing Jubilee.

헐값에 팔리는 부실채권을 사들이거나 기증 받아서 없애버리는 것. 일종의 시민운동으로 전 세계에 걸쳐 전개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아무 부실채권이나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주로 개인이 금융기관에 진 빚이다.

부실채권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은행 대출이나 카드 결제 대금이 연체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에는 은행이나 카드사에서 연락이 온다. 연체가 3개월 정도 되면 은행이나 카드사와 앞에 이름은 비슷한데 뒤는 '신용정보'라고 이름이 다른 곳에서 독촉이 본격적으로 온다. 이때부터는 무지하게 시달리게 된다. 그래도 빚을 청산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진 곳에서 연락이 온다. 이때쯤 되면 빚 독촉이 살벌해진다. 나는 은행에 빚을 졌는데 독촉하는 회사는 왜 달라지는 걸까?

보통 금융기관은 대출 가운데 일정 비율이 연체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일정 기간 이상 연체된 대출을 부실채권으로 분류한 다음 다른 기관에 싼 값으로 채권을 넘긴다. 만약 은행이 계속 가지고 있으면 은행BIS(자기 자본 대비 위험 자산)비율이 높아지므로 정부로부터 규제를 받게 되기 때문에 추심회사로 떠넘기는 것이다. 담보가 있는 대출이라면 은행들이 연합해서 만든 연합자산관리주식회사(UAMCO, 유암코)라는 곳으로 주로 넘긴다. 담보가 있으면 그래도 돈 받아내기가 수월하니 유암코는 엄청난 이익을 올리고 있다.

반면 담보가 없는 신용대출이나 카드 연체는 처음에는 채권추심을 전문으로 하는 자기네 계열사로 넘기지만 연체가 지속되면 나중에는 대부회사 같은 곳에 떨이로 처분한다. 100만 원짜리 채권이라면 5만 원 정도에 떨이 처분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회사나 추심회사는 악착같이 돈을 받아내려고 갖은 술수를 부린다. 만약 100만 원짜리 채권을 5만 원에 20개 샀다고 치면 100만 원이 들어간 것인데, 20개 중에서 10%인 2개만 받아내도 200만 원을 번다. 빚진 사람들은 살벌한 빚 독촉에 죽어나지만 뒤에서는 이런 식으로 떨이 거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10대 때 멋모르고 가입한 학습지 대금 같은 것까지 부실채권으로 거래되어 몇 년이 지난 후에 빚독촉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학습지 회사도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말이다.

그렇다면 롤링 주빌리는?

롤링 주빌리는 바로 이렇게 헐값으로 팔리는 부실채권을 사들이거나 기증 받아서 없애는 것이다. 부실채권이 액면가의 5%에 거래된다면 1억 상당의 부채를 5백만 원이면 사들일 수 있다. 부실채권을 가진 사람한테서 기증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채권을 사거나 받으면 폐기처분하고 채무자에게 '당신의 채권이 소각되었습니다'하고 알려준다. 이런 문자 받고 피싱 사기라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다. 그런데 이런 채무자들 중에는 아예 연락처가 없어지거나 해서 통보조차 안 되는 사람들도 꽤 있는가 보다.

롤링 주빌리를 주도하는 시민단체가 가장 시달리는 게, '내 빚 좀 소각시켜 달라'고 읍소하거나 성질 부리는 연락이 많이 온다고 한다. 이는 불가능하다. 부실채권은 기본적으로 도매 거래가 되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의 채권만 찾아서 소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특정한 사람의 빚만 찾아서 소각하는 게 설령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그랬다가는 폭주하는 소각 요청 전화가 감당이 안 될 것이다. 롤링 주빌리는 어디까지나 무작위 소각이다. 전화해서 내 빚 좀 소각해 달라고 귀찮게 굴지 말자.

비판과 반론

이 운동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도 물론 있다. 가장 많이 나오는 건 이른바 도덕적 해이와 상대적 박탈감이다. 돈을 안 갚아도 이런 식으로 탕감해 주면 성실히 갚는 사람들은 호구냐, 이런 얘기다. 말 그대로 보면 맞는 말이지만 지금 사회의 경제와 금융 구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그렇다면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는 누가 책임지냐는 것이다. 금융기관이 빌려주는 돈은 자기 돈이 아니다. 예금주가 맡긴 돈을 가지고 돈놀이 장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돈을 빌려줄 때 상환이 가능한지를 제대로 판단할 의무가 있다. 그런 거 제대로 안 따져보고 막 빌려 주고 심지어 광고까지 열심히 하면서 돈 없으면 빌려서 쓰라고 부추기는 것도 일종의 도덕적 해이라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카드대란이 어떻게 터졌나 생각해 보자. 월급 달랑 100만 원 받는 사람한테 1천만 원짜리 한도의 신용카드를 마구잡이로 남발했다. 심지어 사은품까지 주면서 치열한 신용카드 발급 경쟁을 벌였다. 소득이 없는 실업자나 대학생들도 손쉽게 골드 카드를 발급받았고 '개도 카드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다. 이건 누가 책임지나? 나름대로 감독기관도 있고 징계도 하지만 그런 걸로 은행 직원이 생계에 위협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모든 책임을 채무자에게만 일방적으로 돌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은행은 대출 신청자에 대한 각종 정보를 열람할 권한이 있고, 금융 거래 기록도 있다. 사실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 자신보다도 금융기관이 대출 신청자가 갚을 능력이 있는지를 더 잘 안다.[1] 그런데도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무리한 대출을 승인하고, 더 나아가 대출을 부추긴다면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실채권의 채무자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탈탈 털려서 속된 말로 불알 두쪽만 남은 경우가 태반이다. 연체 이자라는 게 한번 연체가 걸리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감당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곧 빚을 갚고 싶어도 갚을 방법이 난망하다는 얘기다. 이런 사람들에 과연 도덕적 해이 타령만 하면서 밑도 끝도 없이 독촉에 시달리게 하는 것이 과연 공평한 것이냐 하는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폭력이나 절도, 강도와 같은 범죄은 재판을 받거나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것도 죄값을 치르는 건데, 돈 100만 원 빌렸다가 못 갚고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람은 오랜 시간동안 끝없이 빚 독촉에 시달리고 경제 활동에 크나큰 제약을 받아야 한다. 과연 형펑성에 맞는 것인가 하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물론 소멸시효라는 것이 있어서 법률로 정한 기간 (이 경우에는 5년) 동안 채권자가 권리 행사를 안 하면 채권이 소멸되긴 하는데 일부라도 돈을 갚으면 다시 심지어 소멸시효가 지난 채권이라고 해도 갚을 의사가 있다고 해서 소멸시효가 리셋된다. 이 점을 이용해서 이미 소멸시효가 훨씬 지나버린 채권을 사들인 추심업자가 전화를 해서 만 원이라도 갚으면 원금을 깎아주겠다고 채권자를 꼬드겨서 리셋을 시키는 추심업자들도 있다. 소멸시효에 대해서 잘 모르는 채무자는 그 말만 믿고 만 원을 갚았다가 빚독촉에 본격적으로 시달리게 된다. 더 골때리는 건 이렇게 부활하면 소멸시효가 10년이 된다. 처음의 채권은 일종의 '상행위'로 생긴 상사채권이라서 5년을 적용 받지만 부활하면 일반 채권으로 간주되는 것. 공소시효보다 더하다. 사람을 죽였냐 성폭력을 저질렀나.

우리나라의 대출 관련 제도에도 문제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일단 연체가 되면 돈을 갚아도 연체 이자부터 먼저 상환된다. 연체 이자가 워낙에 세기 때문에 몇 달만 연체되어도 연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돈을 갚아도 원금은 안 줄고 연체 이자만 까지는, 심지어는 돈은 갚고 있는데 연체 이자가 오히려 더 불어나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따라서 연체가 되었더라도 돈을 갚으면 원금부터 상환되거나, 또는 일부라도 원금이 줄어드는 구조로 바꾸려는 입법 움직임이 있다. 또한 주택담보대출은 미국 같은 곳에서는 만약 돈을 못 갚으면 주택만 포기하면 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주택이 경매에 넘겨져도 매각 대금을 뺀 나머지는 그대로 빚으로 남는다. 따라서 금융기관으로서는 리스크가 적어서 대출 승인 여부에 신중할 필요가 별로 없다.

또 한편으로는, 마치 연체자들이 사치나 과소비로 빚을 진 것인 양 보는 시각도 있다. 이는 편견이다. 물론 자기 수입 생각 안 하고 신용카드 긁다가 빚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저소득층 가운데는 백만원 빚을 못 갚아서 인생이 절단나는 사람도 많다. 예를 들어 가족이 아파서 치료비가 필요한데 수입은 변변치 않다. 갚는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돈을 빌려서 치료비를 대는 게 도덕적일까? 아니면 돈 갚을 여력이 안 되니까, 하고 생각하면서 가족이 치료 못 받아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그냥 보는 게 도덕적일까? 또한 채무자들 중에는 처음부터 배짜라가 아니라 갚다 갚다 감당을 못해서 주저앉는 사람도 많다. 연체 이자란 게 한번 걸리기 시작하면 불어나는 속도가 무섭다. 제2금융권은 애초에 이자가 비싼데, 이자가 낮은 제1금융권은 담보가 있거나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 같은 '안정된 직장'이 있어야 한다. 결국 저소득층은 돈이 필요할 경우 비싼 이자를 물게 되어 있다. 연체까지 걸리면 안 그래도 비싼 이자가 더 뛰고, 복리로 붙기도 한다. 원금보다 훨씬 많은 이자를 갚고도 결국 원금을 하나도 못 줄여서 무너지는 사람도 많다. 이게 과연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 문제일가?오히려 약탈적 대출의 도덕적 해이에 가깝다.

사실 따져 보면 100만 원 짜리 빚이 5만 원짜리 부실채권이 되어 돌아다닌다면 그냥 채무자가 그 채권을 사서 없애버리면 될 일인데, 이런 거래는 언제나 도매로 이루어지지 소매는 안 된다. 애초부터 100만 원짜리 채권을 5만 원으로 떨이 처리하고 그 채권을 산 사람은 원금에 이자까지 다 받아먹겠다고 덤벼드는 것도 둘 다 전혀 도덕적이지 않다. 원금의 반만 받으려고 하는 것조차도 부실채권의 헐값과 비교하면 도덕적이지 않다. 고리대금업과 다를 바가 없다. 왜 개인만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하는 반론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실하게 돈 갚는 사람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충분히 그런 감정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연체가 지속되어 부실채권이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고 할 정도가 되면 지독한 빚 독촉에 이미 심신이 망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빚 독촉이라는 게 정말로 인간적인 모멸이란 모멸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는 경우가 정말 많다. 그런 독촉을 한두 달도 아니고 몇 년이나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혹독하다. 처음에는 금융기관, 다음에는 무슨무슨 신용정보, 나중에는 대부업체나 심지어 전문 업자들까지 아주 돌려가면서 시달리다 보면 정말 몸도 마음도 망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만 망가지만 다행이지만 가정까지 망가지고 별거 또는 이혼까지 가는 사람도 많다. 안 당해 본 사람은 빚 독촉이라는 게 그냥 버티면 되는 거 아니냐 싶지만 정말 시달려 보면,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 달 몇 년을 시달리다 보면 돈 있으면 그냥 돈 갚는 게 훨씬 낫다. 일부 진상 채무자도 있겠지만[2] 정말 많은 사람들은 갚으려야 갚을 수가 없는 상황으로 몰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돈 대신에 인간의 자존감과 행복, 정상적인 삶을 대가로 치른 셈이다. 실제로 그 페널티가 워낙에 크기 때문에, 성실하게 돈을 갚은 사람들은 절대 바보가 아니다. 그리고 롤링 주빌리의 대상이 될 정도면 두세달 안 갚고, 이런 정도가 아니다. 사실 그거 사들인 업자도 반 정도 깎이주거나 하는 식으로 돈 받으려고 한다. 100만원 짜리 5만원에 사면 반만 받아도 어딘가. 이것도 투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세상에 사람 윽박지르고 모욕해서 돈 버는 것도 투자라고 할 수 있을까.

각주

  1. 돈을 빌리는 사람은 자신의 현 상황이나 앞날을 될 수 있는대로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편향에 빠지기 쉽다.
  2. 어차피 어떤 좋은 제도이든 악용하는 사람들은 소수나마 있게 마련이다. 그게 무서워서 제도를 시행하지 않겠다면 사회 속에서 실행할 수 있는 제도는 아무 것도 없다.